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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희 X 여주] 구미호AU -1 본문

수상한 메신저(Mystic Messenger)

[제희 X 여주] 구미호AU -1

설멩이 2016. 8. 13. 09:03

여우꼬리맨드라미 : 열정, 치정, 괴기, 감정, 영생, 시들지 않는 사랑




"아가, 저 요산(妖山)에는 가지 말렴.
"왜요?"
"저 산에는 사람의 간을 빼어먹는 구미호(九尾狐)가 살고 있단다.
"구미호가 뭔데요?"
"꼬리 아홉이 달린, 천년 묵은 요괴란다. 절대 저 산을 가까이해선 안된단다. 알았지?"


달이 높게 차올라 만월이 된 밤, 한 부모가 한 소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마을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필시, 그의 여식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일 테다.

"임자, 찾았소?"
"아니요, 아직!"
"대체 어디를 간 게야!"

끝까지 차오른 달이 하늘의 끝에 섰다. 멀리 울려 퍼지는 소녀의 이름이 산에 사는 구미호의 귀에 닿았다.


산의 중턱, 그곳에 그들이 찾던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정자(亭子)에 누워 깊고 가벼운 숨을 뱉으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은빛의 비단 같은 털을 날리는 구미호는 산을 내려오던 중 정자(亭子)에 누워 잠을 청하는 소녀를 보았다.
흔하디 흔한 고동색 머리를 곱게 땋고, 개나리색의 저고리, 무궁화 색의 깃과 고름, 진달래색의 치마를 곱게 입은 소녀였다.

"음..."

소녀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뜨며, 어둠이 다스리는 숲을 보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만월에 의지해 겨우 조금 보이는 숲을.
소녀는 본능적인 공포심에 몸을 떨었고, 구미호는 저 멀리서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소녀는 고개를 돌리며 빛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보다 몇 배는 큰 나무가 소녀에게서 빛을 앗아갔고, 길을 앗아갔다.
어쩔 줄 몰라 그저 어머니, 어머니. 하며 소리 내어 울고 있는 소녀에게 구미호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가갔다.

"아이야."
"누구세요?"

생각지 못한 목소리에 소녀는 화들짝 놀라 질문한다. 하지만 소녀의 눈에는 만월에 살짝 비친, 은색의 털을 가진 여우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소금의 연주처럼.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에 소녀는 소녀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다.

"아이야. 왜 울고 있느냐?
"여우...?"

여우였다. 분명 여우였다. 소금과 같이 감미롭고, 가야금과 같이 청명한 목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분명 여우였다.

"여우가... 말을...?"
"내가 말하는 것이 궁금하느냐?"

문득 소녀는 떠올렸다. 언젠가 아비가 말해주던, 이 요산(妖山)에 구미호(九尾狐)가 산다는 것을.

"너는 몇 년을 이승에서 보냈지?"

열셋이요. 하고 소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구미호는 해골을 머리에 얹더니 만월을 향해 기도한다.
구미호의 커다랗던 귀는 가슴 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칼이 되었고, 길던 주둥이는 점차 사람의 낯이 되었으며, 커다랗던 몸뚱이는 점차 부드러운 여성의 몸이 되었고, 긴 은빛의 털은 곧 눈처럼 하얀 소복이 되었다.

"나는 천 년을 넘게 보냈단다. 채 몇 십 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이 말을 하는데, 내가 못할 리가 없지."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그 누구보다 하얀 피부에 요상한 기운까지 가진 구미호를 본 소녀는 넋을 잃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선녀였다. 마음을 빼앗긴 것 같은 착각에 소녀는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하지만 구미호는 구미호.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린 소녀는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아..."

소녀는 소녀도 모르게 구미호에게 한 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이미 그런 건 상관없었다.
바스락바스락하며 소녀의 발아래에서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구미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반기고 있었다.
분명 구미호는 나를 잡아먹을 심산이야. 절대 가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는 중에도 소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구미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난 죽을 거야. 절대 죽을 거야. 제발 가지 마.
그리고 소녀는 구미호의 앞에 섰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소녀는 식은땀을 흘렸고, 구미호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야."

몸을 크게 한번 흠칫. 구미호는 그 모양이 귀엽다는 듯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널 해치지 않는단다."

한껏 몸을 움츠렸던 소녀는 조심스레 시선을 올려 구미호를 바라보았다. 구미호는 여전히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미모. 선녀와 비교하여 선녀보다 아름다울 것 같은 미모. 소녀를 죽인다 하더라도 원망하지 못할 것 같은 미모.

"정말...요?"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한 소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구미호는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래, 너를 해치지 않는단다. 하며 구미호는 따뜻하게 소녀를 안아올린다. 소녀는 여전히 홀린 채로 얌전히 구미호의 품에 안긴다.

"이름이 무엇이니?"
"저는 진(珍)이라고 해요. '보배 진'."
"보배 진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나는..."

구미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생을 혼자 살며 말을 틀 자를 만들지 않았기에 이름은 당연히 없었다.

"네가 지어주겠니?"

소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분명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거겠지. 입가에 퍼지는 미소를 구미호는 감출 수 없었다.

"음...제희(帝熙) 어때요? '임금 제'에 '빛날 희'에요."
"임금 제, 빛날 희. 좋구나. 고맙구나 아이, 아니. 진아."

구미호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손에 머리를 비비었다.
이름, 이름이라. 영생을 가져본 적 없던 것을 가지니 묘한 기분이었다. 구미호는 자신에게 이름을 준 소녀가 고마웠다.
그리고 멀리서 여전히 소녀를 찾는 부모의 소리가 들린다.

"음, 그나저나 너의 부모가 너를 찾는 모양이구나. 집에 가지 않으련?"

그제야 정신이 든 소녀는 집에 가겠다고 말한다. 구미호는 자신이 입고 있는 소복을 살짝 뜯어 소녀에게 건네준다.

"이 옷을 잘 간직하렴. 그리고 위험에 처했을 때 속으로 나를 세 번 부르렴. 그러면 나는 언제든지 네게 갈 수 있단다."

소녀는 구미호에게 안겨있는 채로 찢어진 소복을 받았다. 눈처럼 하얀 소복은 비단처럼 고운 느낌이었다.

"네가 스물이 되는 해에 너를 데려가러 올 것이다. 그때까지 그 소복을 잘 간직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오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비밀이란다. 알았지?"
"네, 알았어요."

소녀는 구미호에게 홀리지 않은 온전한 정신으로 구미호에게 비밀을 약속했다. 구미호의 요상한 힘 때문인지, 아니면 만월의 신비한 기운 때문인지.

"꽉 잡으렴."


"아이고, 얘야!"

딸을 찾은 부모는 소녀를 붙잡고 한참이나 울었다.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며 몸이 다친 곳은 없는지, 딸아이가 맞는지 확인하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괜찮습니다. 저의 것이니까요."
"예?"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구미호는 웃음을 짓고는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곧 부모는 소녀에게 이것저것을 묻는다.

"애야,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니? 얼마나 널 찾아다녔는지 아느냐?"
"비밀이에요."
"뭬야? 당장 말하렴. 어서!"
"안돼요."

소녀는 구미호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 누구에게도 구미호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얘야. 너는 이미 혼기가 차고도 한참이 넘은 나이다."
"알아요."
"안다고? 알면서 이 어미 마음을 이리도 태우는 것이냐!"

소녀는 자라고 자라 혼기가 이미 한참 지난 스물이 되었다. 본래 열일곱에 시집을 가야 했지만, 소녀는 구미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

"이 어미는 더 이상은 안된다. 이미 혼담을 잡았다. 그런 줄 알고 혼례날까지 집 안에 묶여 있을 줄 알거라!"

소녀가 대꾸를 할 새도 없이 어머니는 소녀의 방 문을 걸어 잠그고 하인을 시켜 문단속을 시켰다. 소녀는 당혹스러웠다.
어머니, 어머니! 안돼요, 전 할 수 없어요!라며 울부짖는 소녀의 말은 어머니에게 닿지 않았다.
소녀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저 방 안에 혼례날까지 갇혀 있었다.


"오늘이 혼례날이란다. 단장은 잘 끝냈느냐?"
"예, 마님."

긴 머리를 곱게 빗고 다시 땋아 올린 머리. 곱게 혼례복을 입고, 얼굴에는 연지 곤지까지 찍은 소녀는 가히 아름다웠다.
소녀의 기억에 남아있는 구미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예쁘구나. 남편이 실망하지 않겠어."

어머니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혼례는 저녁에 치러질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 하며 방을 나섰다.

"아씨, 마님의 명으로 방을 치우겠습니다."
"...그러도록 해."

하인은 소녀의 방에서 물건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꺼내 잘 정리해 놓는다.

"어라, 아씨? 이건 찢어진 소복 아닌가요?"

소복? 하며 하인의 손에서 소복을 본 소녀는 빼앗듯이 소복을 가져왔다. 그래, 이제 됐어. 마음속으로 세 번을 외치면 될 거야.라며 속으로
구미호님, 구미호님, 구미호님. 세 번을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없었다.

"하... 역시, 안될 건 안되는 것인가."
"아씨...?"
"아, 아무것도 아니다. 이 소복은... 내 부적 같은 거란다. 내가 가지고 있어야겠어."


요산(妖山). 요괴 구미호가 사는 산. 구미호는 소녀를 떠내보낸 지 칠 년째 되는 날을 세고 있었다.
정자(亭子)에 누워 본인의 위치를 알지 못해 그저 울던 작은 아이. 인간의 아이.
그 아이는 어찌 지내는지. 아직 나를 부르지 않으니 위험하지는 않은 건지.
그 아이를 최대한 기억하려 하지 않는데도 이리 계속 생각나다니.
스물이 되는 날에. 그날에 데려가야 해.
라며 겨우 마음을 달래는 구미호의 머릿속에 구미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구미호님, 구미호님, 구미호님. 정확히 세 번이 울렸다. 분명 그 아이가 나를 찾는 것이다.

"...아이야."

감에 의지한 채. 또다시 만월이 차오른 날에. 이번에는 구미호가 소녀를 만나러 간다.


"자, 들어갈 차례란다. 잘 마치고 오너라."

소녀는 억지로 떠밀려 혼례를 치른다. 억지로 박을 맞추고, 억지로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며 원하지 않는 혼례를 계속한다.

"두 남녀는 정식 부부가 된 것을..."
"잠깐-!"

산발이 된 검은 머리.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미모. 소매가 살짝 찢어진 흰 소복. 소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구미호였다.

"당신은 누구시오?"
"저 소녀는 내 것이오. 어디 굴러들어온 짱돌이 바위를 빼내려 하는 것이오?"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신랑을 쏘아보며 구미호가 말했다. 소녀는 그저, 자신을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줄 구미호가 반가웠다.
조금은, 소녀와 구미호가 두근거렸다.

"원치 않는 혼례를 올리는 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원하든, 원치 않든 조선에서 태어난 이상 반드시 해야 하는 게 혼례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대체 누구길래 이 혼사를 방해하는 것이오?!"
"아, 당신. 내가 전에 분명히 말했는데. 진이는 내 것이라 말하지 않았소?"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소녀가 사라졌던 그날 밤. 소녀를 데리고 온 것은 흰 소복을 입은, 굉장히 아름다웠던 여자였다.

"서, 설마. 당신 혹시...!"
"그래, 그러니 진이는 내가 데려가야겠어."
"아이고, 아니 됩니다! 제 딸아이만큼은 제발!"

어머니는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 내 딸은 안된다며, 차라리 제물을 가져가라며. 구미호는 제물은 필요 없으니 딸아이만 달라고 하였다.

"아니됩니다, 아니됩니다! 얘, 진아! 너도 와서 빌거라! 살려달라고!"

소녀의 눈은 그 어떤 때보다 생기있었고, 어떤 힘의 개입 없이 소녀는 소녀의 의지로 구미호에게 다가갔다.
구미호도 놀랄 만큼. 소녀는 여느 때보다 생기넘치는 얼굴로. 당당한 발걸음으로 구미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약속 지키셨네요?"

혼례를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 소녀가 구미호를 알고 있었고, 그걸 모두에게 비밀로 했다는 것을.
구미호는 천천히 미소 지으며 소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약속을 잊지 않는단다. 어기지도 않지."

두 손을 맞잡은 둘은 은빛의, 신비로운 기운에 휩싸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속도로.

그리고 그 둘은 요산(妖山)을 떠나 다른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둘만의 장소가 생겼고, 둘만의 시간이 생겼고, 둘만의 감정이 생겼다.

시간이 둘을 갈라놓아 떨어뜨려 놓을 때까지. 그리고 구미호가 다시 소녀를 찾을 때까지.
그렇게 그 둘은 계속,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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